한국교회의 거목이자 과거 교회부흥의 중심이었던 '조용기 목사님'이 오늘 오전 소천하셨습니다. 실로 엄청났던 과거 조용기 목사의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만큰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조용기 목사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조용기 목사의 삶과 업적을 4가지로 나누어 알아보겠습니다.
조용기 목사 죽을병 걸려 만났다
경상남도 울주군 깡촌에서 1936년 2월 14일에 태어난 조용기 목사는 5남4녀 중 장남이었습니다. 부산에 위치한 동래중학교 우등생이었던 조용기 목사는 집안이 어려워지자 기술을 배워 취직을 하려는 마음으로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때 폐결핵 3기 진단을 받고 이제 고작 6개월만 살수 있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궁지에 몰린 조용기 목사는 조용기 목사의 누나 친구가 선물해준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우연히 부산역에서 진행중이던 천막부흥회에 참석하여 켄 타이스 선교사를 만나 영어를 배우고 통역하며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금식기도를 하다가 예수님을 환상으로 만났습니다. "폐병을 치유해주면 평생 나의 종이 되겠느냐"고 물으시던 예수님의 다리를 조용기 목사는 꽉 붙잡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조용기 목사의 폐결핵이 거짓말처럼 완치되고 조용기 목사는 목사가 되어 삶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조용기 목사 서울에서 천막교회' 개척
조용기 목사는 1956년 서울로 상경하여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여기서 평생 믿음의 동역자인 '최자실(1989년 소천)'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급성폐렴으로 힘들어할때 병간호를 해주며 조용기 목사는 같이 어려운 신학생 시절을 헤쳐나갔습니다.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목사는 최자실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서대문구 대조동에 가정교회를 개척합니다. 개척예배에는 5명이 참석하기로했지만 모두 불참하여 최자실 목사 자녀 3명만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원래 미국유학을 갈 생각이었던 조용기 목사는 30명 성도만 만들고 가라는 최자실 목사의 부탁에 응하고, 그 이후 교회는 점점 부흥하기 시작했는데 30명을 넘어 50명을 넘어서자 집 마당에 천막을치고 예배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희망'을 전하는 '믿음'의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중풍병을 고치고 앉은뱅이 소년을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의 천막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3명이 참석했던 교회는 3년이 지나 300여명으로 부흥하였고 말 그대로 서대문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조용기 목사, 서대문 시대를 열다
1961년 1월 군복무를 위해 입대했던 조용기목사는 장에 병이 생겨 수술을 받고 8개월 만에 의가사 전역을 하게 됩니다.
다시 교회로 복귀한 조용기 목사는 존 허스톤 선교사와 동역을 하게되고 이 때 "너는 한국 최대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는 믿음 하나로 1961년 11월 서대문구 충정로에 총 1500명이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합니다. 1962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더욱 집중적으로 노방전도와 믿음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매주 30명씩 성도들이 등록하기 시작했고 만 3년만에 교인이 무려 300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예배는 1,2부로 나눠진행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교인들이 많아지자 조용기 목사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건강도 이 무렵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조용기 목사는 출애굽기 성경을 묵상하며 '천부장, 백부장 등'을 세워 치리한 모세의 영감을 받아 '소그룹'을 만들기 시작했고 순복음교회가 부흥했던 핵심요소인 '교구와 구역'은 이렇게 탄생하게 됐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시작
조용기 목사의 교회는 구역을 중심으로 구역장과 집사, 성도들에 의해 날로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목회 철학은 성도를 양육하고, 힘껏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역은 15명 정도가 되면 새 구역으로 분리시켰고 폭발적으로 부흥하여 1968년에는 8000명을 돌파하여 예배를 3부까지 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용기 목사는 1만명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 현재의 여의도순복음교회 입니다. 그 당시 여의도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모래벌판이었고 교통도 아무것도 없는 미개발지역이었기에 엄청난 반대를 맞딱드렸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재정도 넉넉치 않아 당시 100만원을 갖고 교회 건축을 시작한 조용기 목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새벽기도하며 견뎠고 교회건축에 대한 헌금이 쏟아지며 8억원이 든 교회건축은 1973년에 완공됩니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은 교회는 그야말로 폭발적 성장을 이뤘습니다. 1979년 10만명, 1981년 20만명, 1984년 40만명, 1989년 50만명, 1992년 70만명. 이 인원 때문에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단일 교회로 가장 성도가 많은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까지 하게 됩니다.
한편 1980년대부터 해외선교를 시작한 조용기 목사는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 집회에서 4만명중에서 1만5천명이 회심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이 밖에도 사회복지와 구제사업에 힘쓴 조용기 목사는 노인과 청소년을 돌보는 '엘림복지타운'건설 사회복지법인 '굿피플'을 세워 소외계층을 돕고 빈곤을 퇴치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2008년에는 사랑과행복나눔재단을 설립한 조용기 목사는 계속해서 구제사업에 계속하며 하나님이 이끄신 목회의 말년을 준비합니다.
조용기 목사의 아쉬운 말년
한국교회가 교회세습과 재정의 불투명 등으로 한껏 시끄러웠던 2008년 5월 조용기 목사는 교회투표를 거쳐 현재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양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많은 비리와 물질문제로 비난받던 시기에 엄청나게 컸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러한 결정은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조용기 목사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비리문제와 조용기 목사의 재산을 둘러싼 음모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은 수 많은 논란을 낳았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말년에 당회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사실상 막후에서 교회의 전권을 행사하고, 가족들이 교회 관련 단체들을 통해 교회를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2011년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29명이 조용기 목사가 당회장 시절 교회 돈을 빼돌려 장남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이 주식 투자에 수백억원을 사용하게 했다면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131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조용기 목사는 결국 2017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이 확정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에 큰 힘을 쏟은 조용기 목사의 빈소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됐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빈소 조문은 15일 오전 7시부터 받는다고 합니다. 장례예배는 18일 오전 8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한국교회장으로 치러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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