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포스트 JP'로 불릴 만큼 충청권의 대표 주자로 통한 이완구 전 총리가 별세 했습니다. 이완구 전 총리의 사망 원인은 몇 년전부터 앓고 있던 혈액암 때문인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이완구 전 총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 원내 사령탑에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총리에 오르며 승승장구, 충청권을 대표할 대권주자로 거론되기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 이완구 전 총리의 생애와 사망 원인을 더욱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이완구의 시작
이완구는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에서 태어나 상경해 양정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재학 중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충남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완구는 이어 경찰로 옮겨 31세 나이로 최연소 경찰서장에 올라 고향인 홍성에 부임했습니다. 39세에는 최연소 경무관이 된 이완구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서 파견 근무했고 1986~1989년도엔 약 3년간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근무한적 있으며, 40대 초에 2급 공무원 상당인 치안감까지 올라 충북지방경찰청장, 충남지방경찰청장으로 지냈습니다. 이렇게 이완구의 경찰생활은 마무리가 됩니다.
이완구는 곧바로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이완구는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충남 청양-홍성군 선거구로 출마, 조부영 자유민주연합 후보를 꺾고 당선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이완구의 정치생활
당시 충청도는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 돌풍이 거셌던 상황으로, 이완구는 충남서 유일한 신한국장 당선자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완구는 1998년 정권교체로 공동여당이 된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고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2000년 재선에 성공, 원내총무(현재 원내대표)가 됐습니다.
이완구는 2004년 17대 총선에는 선거구 통폐합 등으로 불출마하고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이후 귀국해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 충남지사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이완구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데 반발해 "충남도민의 소망을 지켜내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지사직에서 전격 사퇴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충청권에서 입지를 다진 동시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도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원을 발판 삼아 '뚝심'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이완구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형사 사건에 휘말리는 아픔을 겪으며 좌절해야 했습니다.
이완구는 2012년 19대 총선을 통해 국회 입성을 노렸지만, 이완구는 그해 초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완구는 이후 불출마를 선언하고 8개월간 치료에 전념하였습니다. 그후 이완구는 병마를 극복하고 2013년 부여·청양 재보궐 선거에서 80%에 가까운 몰표를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고, 이듬해인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하며 중앙 정치무대에 다시 한번 '이완구' 이름 석자를 각인시켰습니다.
이완구는 대표적인 '친박'계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여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워졌기 때문인데요. 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충남도당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당시 후보의 당선에 힘을 보탰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습니다.
이완구 불명예 퇴직
이완구는 2015년 1월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로 지명됐습니다. 취임 전부터 '언론 외압 의혹' '병역 회피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등에 휩싸이며 사퇴 위기를 맞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적극 해명하고 사과하면서 그해 2월 17일 우여곡절 끝에 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완구는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총리에 오른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정치권 금품 제공 메모'가 발단이었습니다. 이 메모에 이완구의 이름이 있었고, 성 전 회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완구에게 3000만 원을 건넸다고 주장했습니다.
악화한 여론과 정치권의 사퇴 압박이 커지면서 이완구는 결국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재임한 지 63일 만의 입니다.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박 전 대통령이 4월27일 사표를 수리함에 따라 이완구는 70일 만에 불명예 퇴진했습니다. 이완구는 이후 정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완구는 이 사건에 대해서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완구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16년 1월 1심에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같은 해 9월 2심에서 무죄로 결론 났습니다. 대법원도 2017년 12월 원심을 확정하여. 이완구의 무죄를 결론지었습니다.
이후에 자유한국당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고 이완구 본인도 명예 회복 차원에서 정치 활동을 재개할 것을 시사하였는데, 이완구는 21대 총선에서 대전, 세종, 충남 지역구 중 가장 파급력이 강한 곳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후에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사실상 정치 일선 후퇴의 뜻을 표했습니다. 이완구는 이후 정치 활동은 원로로서 이따금 현안 관련 조언을 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 자유한국당의 적극적인 출마 제의에도 이완구는 "세대교체와 함께 인재 충원의 기회를 열어주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며 불출마를 선언,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했습니다.
이완구 '다발성 골수종'
이완구는 김종필 총재가 유난히 아끼는 인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번개가 치고 나면 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포스트JP'로 불리며 충청대망론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완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통틀어 유일한 '정치인 총리'였습니다. 그러나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취임 70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최단 총리'로 기록된 불운의 총리이기도 했습니다. 화끈한 결단력과 호탕한 모습으로 많은 세력을 확보했었던 이완구는 2012년에 시작된 '다발성 골수종'에 발목을 잡혀 2016년 암이 재발해 가장 최근까지도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완구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어찌보면 71세라는 조금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됐습니다.
이완구의 가족으로는 와이프 부인 이백연씨와 두 아들을 자녀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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